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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상록/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전쟁하면 흔히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들, 배웅하며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가족들을 상상하거나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에 오열하는 가족들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전선으로 떠난 군인은 남성으로 치환되고 "안전한" 후방에서 기다린 가족들은 여성 또는 어린아이들이 대입된다. 이 또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낸 하나의 환상으로, 전선 또는 후방의 물자, 보급 등 전쟁의 필수 요소 어디에서도 여성이 개입되지 않은 적은 없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나름 승전국이지만,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받은 소련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조국 대전쟁으로 불리는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인 스베틀라나는 서두에서 명백히 하듯이, 전쟁을 큰 이벤트의 서사적 흐름이나 정치인, 장군들이 다투어 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항상 배제되어 왔던 여성 각각의 인생,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상한 점은 굳이 소련에 대한 흑백선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번번이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고, 87년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앞세우고 나서야 출간이 되었다고 한다. 출간할 수 없었던 이유로 든 것은 "너무 끔찍해서", "승리가 돋보이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책의 제목이 의미하듯이 전쟁이란, 특히나 승리로 끝난 전쟁은 남성의 모습으로 기억돼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임이 자명하다.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나이가 매우 어려서 징집이 거부됨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나이를 속이거나 최전선으로 최전선으로 가는 기차에 억지로 올라타는 등, 그들이 전쟁에 참여한 태도가 흔히 생각하 듯 강압적인 정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었던 듯하다. 복무한 병과도 매우 다양해서, 여성이 주로 많았던 간호병뿐만 아니라 직접 전선에서 부상자를 옮기는 군 의병도 소개되어 있다. 그 외에도 여성이 많이 없다고 생각하는 포병이나 운전병, 지뢰 제거반인 분의 이야기도 있다. 

 

빨치산에 참여한 사람의 기록은 특히 괴롭게 들린다.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를 데리고 산에 들어가 빨치산에 참여하며 가는 작전마다 데리고 다니는 상상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거나, 아니면 나찌가 마을에 들어와 보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녀에게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전쟁이 끝나서야 나오는 그런 것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잡혀서 모질게 고문당하다가 수용소에서 해방을 맡았다는 서사들이 이어진다. 

 

좀 당황스러웠던 점은, 이 여성 참전인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의 참전 사실을 숨기려 하고, 가족들조차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와는 별개로 자랑스러워야 할 참전 사실이 왜 부끄러운 일일까, 전쟁에 나가서 피를 본 여자에게는 누구도 결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란 게 대표적 이유다. 전쟁에 나가 남을 죽인 경험이 있는 여성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심지어 한 여성은 전쟁 때 전선에서 전우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부끄러움에 사진들을 전부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도 소개된다.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얘기가 철저히 배제된 상황에서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할 수 없다. 저자가 말하듯, 역사가 승전국에 의해 다시 쓰인 기록이라면 승전국의 기록에서 조차 그것은 남성들의 전유 기록이 되고, 그것들만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게 된다.

 

비록 대접은 받지 못한 영웅들에게도 똑같은 것은 전후에 찾아오는 고통만이 유일하다. 아무리 드레스가 좋아도 빨간색으로 된 옷은 절대 못 입겠다는 분도 있고, 정육점에 갈 일은 전부 남편에게 맡긴다거나, 아직도 큰 나무 근처에 묻었던 시체들 때문에 들로 나가는 게 무서운 여성 분들도 있다. 여성이 전쟁에서도 일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승전에 대한 대가조차 나눠주기 싫다는 걸 국가가 명백히 보여주었는데 다음 번 누가 국가가 어려울 때 나서려고 할까?

 

저자가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전쟁을 이벤트 흐름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 감정을 다루지 않고는 볼 수 가 없다고 했는데, 아마도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감추려고 했던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가족들이나 다시는 찾지 못할 평온 같은 것들은 서사적 흐름 앞에서 큰 장군들이 벌이는 싸움의 배경일뿐이지, 한 번도 그 중심에 있었던 적이 없다. 전쟁을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변해버린 일상과 감정의 변화가 그 중심에 있고, 거기서 전쟁의 비극은 더욱 실제처럼 커 보이고, 호전적이어야만 하는 국가 프로파간다는 힘을 잃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다른 전정에서도 - 특히 한국 전쟁 - 여성들의 서사가 더 두드려져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