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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상록/책

윌리엄 바렌츠의 북극항로 개척, <Icebound>

어떤 인물이 거듭된 실패를 연달아 세 번씩 겪고 결국 마지막 항해에선 숨을 거두었는데,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바다에 자신의 이름이 붙을 거라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현재 러시아 극지방에 위치한 섬 "노바 젬블라" 서쪽의 바다를 "바렌츠 해"라고 부르고, 극지방 탐험가들의 영원한 모범이 된 사람이 있으니, 그게 바로 윌리엄 바렌츠다. 

 

바렌츠해, 동쪽으로 길게 늘어선 섬이 노바 젬블라 섬이다. 이 곳에서 바렌츠와 선원들이 겨울을 보냈다.

 

당시 유럽에선 북쪽을 건너 크게 동쪽으로 가로지르면 곧바로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가 존재할거라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들으면 터무니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고, 희망봉을 지나 인도와 무역이 가능하단 걸 깨닫게 되면서 그중에서도 신흥국으로 떠오른 네덜란드는 강대국 스페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새로운 항로 개척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Icebound>는 이 3번의 북극항로 개척에 관한 이야기다. 윌리엄 바렌츠는 처음부터 함대를 이끈 건 아니지만, 점차 선장으로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었다. 책은 항해에서 있었던 일들을 매우 건조하게 소개할 뿐, 선원 개개인에 삶이나 감정에 집중하진 않는다. 목적지 자체가 애초에 극지방인 것을 생각하면 황량한 배경에 어울리는 전개인 듯하다.

 

물론 망망대해만 이어지진 않았고, 흔히 생각하는 극지방의 생물들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바다표범, 특히 북극곰은 선원들을 끊임없이 공격했고 여기에 맞서던 선원들은 나중엔 본국으로 가져갈 트로피쯤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사냥했고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패턴이 되었다.

북극에 도착한 네덜란드인들은 마치 살육을 본능적인 반응처럼 해댔고, 이 것은 뒤이어 도착한 많은 유럽인이 벌이는 똑같은 살육의 전조였을 뿐이었다. 인류학자인 P.J 카톨리티는 이처럼 북극탐험서 벌어졌던 많은 야생동물 사냥을 두고 "지금까지 무언가 남아있단 것 자체가 기적이다"라고 평했다.

<Icebound>라는 제목서 예상하듯, 3번의 북극항로 개척은 빙하에 막혀 번번이 돌아가야만 했고, 조금만 더 가면 얼음이 없는 대해가 펼쳐질 거란 생각에 집착했던 바렌츠는 결국 3번째 항해에서 다른 함대와 갈라진 후 노바 젬블라 섬 북쪽에서 얼음에 갇혀 결국 그곳에서 겨울을 나게 된다. 

 

북반구 당시 지도에 나오지도 않는 섬에서 겨울 내 밤만 계속되는 극야를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것도 화석연료를 쓰기 전인 16세기 사람들에게 이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원들은 피난처를 세우고 얼음이 녹아 다음 해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윌리엄 바렌츠와 선원들이 만든 피난처.

바렌츠와 선원들은 고대 문명인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나왔지만 지금은 고고학자들처럼 땅을 파고 옛 기술을 익히며 자신들이 왔던 문명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이는 눈, 끊임없이 선원들을 위협하는 북극곰.. 그 무엇보다 해가 뜨지 않으니 아무도 며칠 째인지 알 수 없는 날들. 신선한 채소가 없으니 괴혈병까지 돌아 겨울이 끝나갈 즈음엔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가 묘사되는데, 코로나로 갇혀 지내는 요즈음 날들은 차라리 사치라고 믿어질 만큼 괴로운 상황이 지속된다. 

 

이듬해 선원들과 같이 탈출하던 바렌츠는 결국 죽었지만, 탐험의 기치를 높이 산 네덜란드는 윌리엄 바렌츠를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했고 경제적인 의미에서 빈손으로 끝날 것 같던 북극항로 개척은, 바렌츠라는 영웅의 등장-그리고 죽음-과 함께 새 시대가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바렌츠와 선원들을 여름 해까지 괴롭히던 빙하는 21세기 들어 여름에는 완전히 사라지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적어도 여름엔 쇄빙선이 없어도 중국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 상상에 있던 극지방의 조건이란 것도 과도한 인간의 활동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렌츠도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봤던 극지방의 혹독한 조건조차 녹아내리게 만드는 정도의 힘이라면, 이게 극지방의 항로만 개척되는 정도로 끝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